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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의 情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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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난 노숙자 여고 동창모임에 간다며 현관문 열고 나가려던 마누라가 문을 열다 말고 휙~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거실에 어정쩡 서 있는 나를 향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그 큰 입으로 한참을 씰룩거린다. "아무리 집안 구석에 빈둥거리는 신세더라도 수염은 좀 깍지 그래. 꼭 역전에 누워있는 노숙자 같잖아..." "................" 옛날 같았으면 버럭 화를 낼만한데 오늘도 나는 여느 날과 같이 마누라의 얼굴을 멍하니 초점 없이 쳐다만 본다. 이윽고 마누라가 나간 후에 나는 어슬렁어슬렁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거울 속 남자를 훔쳐본다. 거울 속엔 정말로 수염이 덕지덕지 솟아있는 노숙자 한 녀석이 맹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짜샤~! 왜 이렇게 사니?"
너 없인 못살아! "너 없인 못 살아!" 신혼 초에 아내와 내가 키득키득하며 속삭이던 말이다. "당신 때문에 못 살아!" 오십몇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밤 아내와 나는 서로 삐죽이며 가슴속으로 불쑥 내던진 말이다. 그렇다. 유행처럼 번지는 별거, 졸혼도 못하고 아직까지 꽁꽁 묶인 밧줄에 묵인 채 사는 걸 보면 우리 부부는 심한 병에 걸린 걸린 인간들이다. 무슨 병이냐고? 글쎄 '맹한 사랑병'아닐까? 어휴~! 맹추, 바보, 칠삭둥이..... 이걸 어째!
내 '여보'의 갑질을 말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이 칠십하고도 절반의 세월을 껑충 뛰어넘은 이 여자. 바로 내 '여보'다. 어느 날부터인가 '여보'는 자신의 신분이 에서 으로 뛰어올랐다고 말끝마다 꼬장꼬장한 폼을 잡으며 으스대는 여자다. 그러고는 말끝마다 지나간 '을'의 억울한 세월을 보냈다고 남편인 나에게 도깨비 눈을 만들어 사납게 흘기는 여자다. 사실은 우리 부부 사이에 과 은 애초부터 없었는데도 '여보'는 막무가내로 있었다고 박박 우기고 있다. 이제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세월. 한숨으로 꽁꽁 엉켜있어 그저 눈앞이 아득하고 캄캄할 뿐이다. 에고~! 이 녀석을 어찌할 거나.
마누라의 한숨 집에 두고 오면 근심 덩어리. 같이 나오면 짐 덩어리. 혼자 내보내면 걱정덩어리. 마주 앉으면 웬수 덩어리. 마누라가 뒤돌아서서 긴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래 마누라 말이 맞아. 내가 어쩌다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을까? 기가 탁탁 막힌다, 정말. 나도 마누라 따라 한숨을 푹푹 내려 쉬었다.
나 자신이 생각하는 정신연령 법적 연령 82세. 외모 연령 65세. 신체 연령 70세. 아내가 보는 내 정신연령 12세. 나 자신이 생각하는 정신연령 52세. 내가 다시 꿈꾸는 정신연령 65세. 온통 헷갈리는 남자 하나, 세상에 땅 밟고 있다. 이름은 삼시 세끼 삼식이, 또는 백수. 에고~! 이 녀석을 어찌할까?
전화 받기가 겁이 난다 "따르릉~ 따르릉~" 핸드폰의 벨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얼른 들어 받기가 겁이 났다. "나, 석진이야. 종근이 있지? 그 넘도 방금 떠났다고 전화받았어" "그래? 또 한 넘 갔구나..." 이제 몇 넘이나 남았나 ................. 그래서 전화 받기가 겁이 난다.
마누라에게 사랑 받는 남편은? 남자가 직장 은퇴 후에 아내에게 가장 사랑받는 남편이란 첫 번째, 노후 준비 잘해둔 남편, 두 번째, 요리 잘하는 남편, 세 번째, 아내 말 잘 듣는 남편들이란다. 쯧쯧쯧! 모두 고리탑탑하고 웃기는 대답들이다. 놀라지 마라! 아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편은 하루 종일 집에 없는 남편이란다. 어휴~! 이걸 어째...
마누라 얼굴 우연히 바라본 아침 식탁에서의 마누라 얼굴, "왜 쳐다봐? 나, 늙었다고?" 으흐흐~~ 족집게가 따로 없다. 어떻게 내 생각을 알았을까? "늙기는… 당신 얼굴에 밥알이 묻었잖아" 얼렁뚱땅 급 변명으로 모면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세상에 안 늙는 여자 없다더니 기어히... 하느님도 너무 하셨어. 그래요. 그래요. 나도 안다구요. 이 모두 다 이놈이 죄인입니다.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