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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시집간 딸과 내 병원 퇴원비문제로 신경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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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운전을 하면서도 계속 백미러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뒷좌석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나는 차창 밖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차창 밖은 내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26일간의 감옥 같은 병실에서 탈출했다는 기쁨의 눈물일까?
아니면 딸아이 때문에 가슴 속 밑바닥에서 뭉클 솟아나는 감동의 눈물일까?

 

요 며칠사이 열이 40도를 오르내렸다.

심상치 않은 내 몸상태를 진단한 의사는 단호하게 즉시 '입원'이라는 통보를 내렸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의식하기도 전에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얼마나 큰병이기에 입원조치를 내렸을까?

하루이틀에 퇴원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입원비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5년 전 서울대 병원에서의 암수술 때의 입원치료비로 거의 1천만 원에 가까운
병원비를

낸 적이 있었기에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병실에 입원하고 꼭 7일되는 날 중간진료비 청구서가 날라 왔다.
내가 잠깐 없는 사이에 딸아이가 받았나 보다.
아내는 딸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 청구서 영수증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불과 일주일사이에 1백만 원이 훨씬 넘는 의료비 본인 부담금의 병원비였다.

- 누가 냈어?
-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가 납부하고 영수증을 주던데...

순간 가슴이 쿵하고 주저앉았다.
이번만은 딸아이에게 신세를 지지 말아야지 했던 결심이 와르르 허물어져 버렸다.
우리 내외가 감추며 살았던 허세의 모습을 딸에게 또 들킨 것 같아 영 마음이 좋지 않다.
 
일산의 중심가에 노른자위 50평대 아파트를 팔고 좀 작은 아파트로 이사한 것은
당시의 내 수입에선 솔직히 감당키 어려워서였다.
그동안 큰아이와 딸아이의 미국, 영국 유학비로 5,6년 동안 엄청난 돈이 들어가긴 했었다.
그렇다고 학업 중간에 불러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소리였다.
퇴직금을 믿고 은행에 집을 담보로 끌어 쓸 수 있을 만큼 당겨썼다.
그리고 아이들 2년차로 내리 결혼시키는 바람에 월급쟁이로써는 보통타격이 아니었다.
부지런히 외부 일러스트를 그려 원고료를 보탰다.
부모로써의 내 자존심은 꺾기고 싶진 않았다.
 
명예퇴직을 신청하면서 받은 퇴직금으로 일부 은행 대출 비를 갚고
남은 돈으로 마포의 조그마한 오피스텔을 하나 사서 내 작업실을 꾸몄다.
의외에도 일러스트 외 디자인 작업(?)이 많아지는 바람에 공덕동에 신축오피스텔을 하나 더 분양받았다.
그렇게 한참을 잘나가나 싶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하얀 백발의 나를 출판사 담당자들은 '어르신, 어르신' 하면서 자꾸 거북해했다.
그러면서 클라이언트들도 하나씩 빠져나갔다.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리겠다는 것이다.
 
나는 과감하게 작업실을 접었다.  
분양받은 신축 오피스텔은 월세를 받는 임대를 주었다.
그리고 매달 일정액의 연금 나오고, 몇 개 안되는 신문에 고정 원고료에다
가끔 책 발간해 들어오는 인세와 푼돈 원고료 등등으로 죽을 때까진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기로 했다.
우리 두 식구, 그리고 동거견 두 녀석들과 같이 살아갈 만하다.
씀씀이가 컸던 우리 내외는 겉으로는 기가 죽어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가끔씩 이렇게 터질 때는 그 목돈이 좀 감당키 어려운 것은 사실이라 속으로 끙끙대기도 한다.
눈치가 빠른 딸아이는 부모가 아무리 위장해도 친정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주일마다 꼬박꼬박 날라오는 중간진료비 청구서들


나는 두 번째의 중간 진료비가 나오기 전날, 아무도 모르게
링거가 달려있는 쇠막대기를 질질 끌면서 1층에 있는 수납창구로 갔다.
그리고는 중간 진료비를 카드로 긁었다.

또 백만원이 넘는 진료비였다.
-진료비가 정말 사람 잡겠구나.
무조건 10개월 분할로 나누어 달라고 했다.
세 번째 진료비도 딸아이 모르게 냈다.
더 이상 딸아이에게 신세를 진다는 것은 부모로써도 창피한 일이다.
다행히도 내가 퇴원하는 날 오전엔 딸은 병원에 오지 못했다.
손녀의 유치원 준비 때문이었다.
마지막 퇴원비수속도 아내가 내려가 카드로 긁었다.
입원 26일 만에 무려 5백만 원에 가까운 거액이었다.
온몸을 이잡듯 뒤지면서 온갖 검사를 다했다. 그러면서도 40도의 열은 잡지 못했다.
돈은 돈대로 깨졌다.
 
퇴원수속을 하고 있던중에 내 핸드폰이 드르륵 떨렸다.
-아빠! 그동안 진료비와 퇴원비를 카드로 다 냈지?
 나, 지금 우리 동네 은행이거든, 아빠가 카드로 낸  X백만 원 아빠계좌로 넣었어.

 
가슴이 뭉클 내려앉았다.
딸 모르게 한 짓이 한 번에 물거품이 되었다.
-정아, 왜 또 그랬니? 아빠 아직까지 죽지 않았어.
내 눈에선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내 말소리도 따라 울고 있는 것 같았다.

- 아빠, 우린 괜찮아.
  우리 시부모 병원에 입원하면 우리가 병원비 내잖아.
  내 친정부모 입원하면 우리가 내는 것 당연하잖아.
  예주 아빠가 더 난리야. 빨리 준비하고 가서 병원비 내라고...

 
나는 더 이상 대답을 못했다.
딸아이에게 울먹이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이다.

- 아빠, 우리 아파트 한강변 녹지 재개발로 무지하게 올랐거든 히히히...
   그럼 오늘 저녁 예주 아빠랑 일산 집에서 봐요.

딸아이는 잽싸게 전화를 끊었다.
내가 벌써 죽었나?
나는 아직 이렇게 살아 있잖아.
살아있는 한 적어도 내 먹이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건데...
그 새 몸도 마음도 벌써 쇠약해져 버린 걸까?
딸 녀석이 재빨리 알아차리고 나를 뒤로 미루어 놓는 게 가슴 아프다.
아내는 계속해서 백미러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달리는 차속은 에어컨으로 참 시원하다.
그러나 차창 밖은 폭염으로 푹푹 찌고 있는 날씨인 것 같다.
 
이러다 정말 '울보아빠'되겠다.

<불명열로 입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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