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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어느 노인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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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인의 편지


어차피 때가 되면 생을 마감하고 떠나갈 나에게

떠날 준비는 되어 있느냐 빙빙 돌려 물어본다면

내가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지?


더 살고 싶다고 하면 욕심 많은 늙은이라 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나의 숨은 비애를

살짝 감추고 사는 지헤가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여

내가 가끔은 그대들이 원치 않는 이기적인 추한 모습

생애 집착하는 모습 보일지라도

아주 조금만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지요.


하늘이 준 복과 수를 다 누리라 축원하고

오래 살라 덕담하면 좋다고 고맙다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나도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평온한 죽음을 맞게 해달라고

오늘은 내 입으로 꼭 한 번 말하고 싶었다오.


그러니 부디 지상에서의 나의 떠남을

너무 재촉하지는 말고

좀 더 기다려 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나의 짐이 아닌 축복으로 여겨달란 말은 않을테니

시간 속의 섭리에 맡겨두고

조금 더 인내해 달라 부탁하고 싶습니다.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는 뜻으로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어설픈 편지라도 쓸 수 있으니

쓸쓸한 중에도 행복하네요.

어쨌든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나의 처지에

오늘도 미안한 마음 감출 수가 없지만

아직은 이렇게 살아있음이 그래도 행복해서

가만히 웃어봅니다.

이 웃음을 또 치매라고 하진 않을까

걱정되지만 그래도 웃어봅니다.

*

이해인 시집 <작은 기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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