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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모녀의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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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을 보내고 다음 날 저녁 8시쯤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우리 내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시사 TV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냄새가 나면서

마룻바닥에 스멀스멀 안개 같은 것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이 연기 같은 것들"

"어머머, 불?"

아내와 나는 동시에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갔다.

인덕션에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았다.

에어컨 코드도, 내 방에 컴퓨터 전기 코드에도 이상이 없었다.

"뭐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어느새 연기는 여기저기 틈새를 비집고 거실 자욱하게 피어 올랐다.

황급히 마당 쪽 창문을 열어 아래를 내다봤다.


"아~! 소방차들 봐!"

"어머머!"


불이 난 것이다.

사이렌 소리도 없이 대 여섯의 소방차들이 마당에 흩어져 있었다.

마당은 이미 소방대원들과 주민들로 아우성들이었다.


"어디서 불이 난 거야? 그런데 우리는 왜 듣지 못했지?"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연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앞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시 문을 닫았다.


도로 쪽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봤다.

우리집 보다 3층 밑 803호 창에서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머리가 아득했다.

이대로 꼼짝없이 당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후들거렸다.

아내는 울면서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


무엇부터 챙겨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아니면 이대로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것인지.

옥상으로 올라가려고 해도 현관문을 열 수가 없잖은가?

11층이라 뛰어내릴 수도 없다.


플래시를 들고 마당 쪽 창문으로 다가갔다.

밑에 있는 소방관들에게 플래시를 좌우로 흔들면서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해요? 여기 11층이에요"


소방관들이 알았다고 손을 흔든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소방관과 눈물로 범벅이가 된 딸내미의 얼굴이 보였다.


"이대로 나오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진화될 겁니다"

소방관은 딸내미를 밀어 넣고 다시 현관문을 닫았다.

이웃 동네에 사는 딸내미는

불야불야 차를 몰고 달려와 

정신없이 서있는 엄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엄마, 엄마, 엄마!~엉엉엉"

"정이야, 정이야~! 흐흐흐"



불을 진화하고도 소방차 한대는 몇시간을 남아 있었다.

803호는 부부와 중학생 아들과 강원도 스키를 타러 간 사이에

건너방 컴퓨터 코드에서 불이 난 것으로 추측했다.

혼자 남아있던 강아지는만...ㅠ.ㅠ




발 빠른 소방관들의 활약으로 803호의 불은 몇십분 만에 꺼지기는 했지만

놀란 가슴은 계속해서 두근거리기만 했다.

사람의 운명이란 한 치 앞을 못 본다는 말이

이렇게 정곡을 찌를 줄이야.


****


다음 날 딸내미에게 톡으로 보낸 사진을 보고 대뜸 전화를 걸어 왔다.

"아빠는 그 난리 속에서도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어요?

정말 이상한 아빠 아니야?"


나는 쿡 웃었다.

<글쎄, 나도 모르게 23년의 신문사 기자 정신이 배어있었나 봐>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래, 정말 이상한 아빠 맞다.


나중에 소식을 전해 들은 친지들은 하나 같이 말했다.

"정초에 일찌감치 액땜했네요"

정말 액땜한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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