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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사표와 맞바꾼 '종이웨딩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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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와 맞바꾼 '종이웨딩드레스'



요즘 젊은 남녀들에게 들려 줄만한 얘기꺼리가 될것 같아서 옛날 스크랩을 꺼내 옮겨 적는다. 
 
1970년, 내가 남산의 모 텔리비젼 방송국 미술실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문화공보처에서 연락이 왔다.
그 해 국전(國展)에 출품했다가 찾아가지 않은 사진작품이
여러점 있으니 혹시 방송에 도움이 된다면 가져다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그 때만해도 방송국엔 항상 영상자료가 모자랐던 차에 잘됐다 싶어 쓸만한 작품 10여점을 골라 왔다

그런데 그 사진들 중에 내 눈에 시선을 끄는 작품이 한점 있어
사무실의 내 뒷자리에 걸어 놓고 가끔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여름아이들>이라는 제호의 사진으로 개울가에서 아이들의 물장구 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의 구도라든가 순간 포착이 맘에 들었다.

 
그 지음 나는 S대 사진과를 졸업한 아주 성격이 활달한 아가씨와 데이트중이었다.
내가 미대 출신이었고 그 녀는 사진과 출신이어서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항상 나름대로의 예술론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남녀간에 성격과 주고받는 대화가 맞물려간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이다.
서른 살의 노총각인 나에게는 이 아가씨는 굴러들어온 천사였고
그녀에게 이 멋진(?) 남성은 백마타고 온 왕자였던 것이다.ㅋㅋㅋ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대화중에 내 사무실 뒷벽에 걸려있는 사진이
그 녀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간 너무나 놀랐고 기이한 인연에 감격했다.
감격을 잘하는 예술인들의 만남엔 으례'사건'이 매달리게 마련이다.
우리는 어느 새 결혼하기로 약속을 했고 그리고 문제의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
 
 "웨딩드레스를 종이로 만들면 어떨까?"
 
그것은 다름아닌 결혼 할 때 입을 신부의 드레스를 종이로 만들자라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에 스케치 해 두었던 디자인을 그녀에게 보였고
그녀는 두말 않고 좋이리고 O.K사인을 보내왔다.

드레스의 디자인은 A라인으로 펼쳐진 종이드레스위에
3백여 송이의 종이 꽃과 다섯겹의 종이 면사포가 머리에 얹혀져 있고
베일은 등에서부터 5~6 미터가 되게 길게 드리워졌다.
베일의 마지막 끝자락엔 역시 커다란 종이 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 녀는 우선 비싼 옷 빌려입지 않아서 좋고, 남이 입었던 옷이 아니라서 더 좋다고 활짝 웃었다.



▲ 당시 한국일보에서 발행한
'주간여성'에 화보로 찍힌 사진이다.
종이였는데도 꼭 헝겁같이 보였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꼭 시기하는 '악마'가 끼게 되어 있다.
어떻게 비밀이 새어 나갔는지 방송국의 고위층 한분이 종이웨딩드레스에 대해 펄펄 뛰고 나섰다.
공무원 신분에 히피족들이나 입는 종이 옷으로 결혼식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않된다는 것이었다.
꼭 입어야 한다면 사표를 내고 입으라는 최후의 통첩을 해 왔다.
우리는 당황했다.
이런 반대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오히려 "멋진 이벤트야!"하고 격려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TV방송국에서 근무할만 한 아이디어가 충만한 직원이라고 칭찬까지 내려 줄지 알았다.

우리는 며칠을 두고 고심했다.
'결혼 하자마자 직장 잃은 백수가 되어도 좋으냐,
아니면 아예 없던 일로 하고 직장을 충실히 다니느냐'였다.

그러나 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소위 최첨단을 달린다는 텔리비젼방송국, 그것도 고위층의 사고방식이 그렇게 낡았다면
나 자신이 더 이상 이런 곳에서는 내 꿈을 펼칠 수는 없다라는 결론이었다.
그 녀도 이런 나의 결정에 뒷심을 실어주었다.
물론 양가의 부모들도 이런 우리의 결단에 힘을 실어 주었다.

 
'낡은 사고'의 고위층에게 사표를 던졌다.
 
하얀 봉투위에 '사직서'라고 크게 써서 데스크위에 던져 놓고 나는 결혼식장으로 달려갔다.
꿈결같은 웨딩마치가 흐르고 식이 시작됐다.
예식장 천정위의 조명등이 꺼지고 실내는 어두워졌다
한줄기 밝은 스폿트 조명을 받으며 그 녀는 하얀 종이드레스의 베일자락을 끌며 단상의 나에게로 다가왔다.
마치 한 마리 하얀나비 같은 자태로..

 
소문을 듣고 찾아 온 잡지사 사진기자들의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객석에서는 탄성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장하는 신부의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만져 확인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만류하던 그 고위층의 모습도 내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종이드레스를 입고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러 온 것 같았다.
며칠 뒤 신혼여행지에서 사서 본 주간지 등에는 우리의 결혼식 사진과 기사가 톱을 장식했다.



▲당시 주간지에 실렸던 기사.



<한국 최초의 종이 웨딩드레스 탄생!>
<새 생활 운동 보급에기여!>
<종이드레스 비용 2천4백원!>


티이틀도 모두 긍정적으로 달아주었다.
결국 우리들의 이벤트는 성공이었다.
내가 낸 사표는 반료되었다.
이젠 먼 옛날 이야기가 되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신나는 결혼식 이벤트였다고 빙긋이 웃어본다.

언젠가는 제 2호의 종이웨딩드레스가 탄생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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