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癌)선생! 날 데려가신다구요?
2008년 3월 14일(금)
서울대 치과병원. 정기 스케링을 받았다.
주치의가 수술부위의 백태가 조금 커진 것 같다고 한다.
만일을 위해 조직검사를 받는 것이 좋을 듯 하단다.
3월 21일(금)
수술부위의 조직을 떼어냈다. 그리고 세 바늘 꿰매었다.
3월 28일(금)
꿰맨 곳의 실밥을 뽑았다.
조직검사실에서 재검사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결과는 다음 주로 연기했다.
4월 4일(금)
조직검사 결과, 재발은 아니란다.7월에 다시 한 번 체크하기로 했다.
그리고 11월에 4번째 MRI찍기로 예약했다.
*
오는 11월이면 암 수술한지가 만 7년째다.
통상 5년까지는 재 발병의 위험성이 있기에수시로 체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모두 이 말속에 담겨있다.
오로지 살겠다는 발버둥 치면 죽을 수도 있고,
대신 그만 죽을 수도 있겠다고 체념하면 의외로 살 수도 있다는 말이다.
흔히들 말하기를 세상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생의 길도 달라질 수가 있다는 말이다.
꼭 6년하고도 몇 달 전 일이다.
2004년 11월.서울대 치과병동 입원실 718호실.
치켜세운 침대 등에 비스듬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경희궁 쪽이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과 붉은 단풍잎들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정말 아름다운 한 폭의 가을 수채화였다.
'평평세포암종'나의 구강암 병명이다.
사흘 동안의 입원검사는 MRI에서부터 PET 촬영, 초음파검사, 세포조직검사 등
인내력이 필요한 10여 가지의 초정밀 검사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주치의로 부터 잔인스럽게도 '암(癌)'선고를 받았다.
순간 대부분의 암환자들이 쓰는 '청천벽력'이라는 말이 나의 뇌리를 때려 짓눌렀다.
그리고 바로 현기증 같은 느낌이 확 풍겨져 나왔다.
'아~ 이런 걸 보고 마지막이라고 하는 구나...지금까지 잘 버텨왔는데...
60대 초반의 나이. 그래, 뭐 이 정도면 인생 내 명대로 살았네...'
이상하게도 나는 바로 체념상태로 빠졌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물론 선고를 받는 즉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없진 않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순간뿐이었다.
참으로 담담했다. 그리고 찬찬히 나를 생각해 보았다.
-아들 장가보냈고 딸도 시집보냈지.
아내는 집 한 칸 남아 있으니 그 걸로 살아 있는 동안은 자식 신세 안지고 살 수 있겠구나.
-영원히 죽지 않는 인생이라면 나 먼저 가니 억을 하기도 하겠지만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인데, 뭘 안타까워 할 필요가 있나?
운 좋았다면 몇 십 년은 더 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주라는 영겁(永劫)에 비한다면
정말 눈 한번 감았다가 뜨는 것보다 더한 찰라 일 뿐인데, 부질없는 욕심....
-인도의 매력에 이끌려 세 번씩이나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그네들의 삶과 두려움 없는 죽음의 사고가어느 새 나에게도 전이가 되었던 것인가?
그래서 이렇게 죽음 앞에 초월한 건가?
주치의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내 입속의 오른 쪽 볼에 사방 2센티의 정도의 암 종양이 보이는데
아직까지는 임파선이나 또 다른 부위에 전이는 되지 않아
수술로 종양만 제거하면 후유증은 크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암이지만 수술로 거의 완치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얼마나 고마운 말인가?
법무관이 사형 직전의 죄수를 교수대에서 내려놓고
'당신은 유기수로 감형 되었습니다'라는 말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수술 전날 저녁에 간호 팀장에게 말하고 몇 시간의 휴가를 얻었다.
바로 택시를 타고 마포의 내 사무실로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참으로 착잡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겨왔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앉았던 의자였고,
늘 만지던 컴퓨터, 책, 그림화구들이였는데오늘 따라 낯설어 보이는 것은 웬일인가?
'나에게서 벌써 이별의 눈빛을 감지했나?
그래! 잘 못 된다면 이 모든 것들과 영영 이별이 될지도 몰라...'
책상 설합의 서류들을 꺼내 하나씩 정리했다.
누가 들어와도 찾아보기 쉽게 원탁회의 테이블에 사무실 권리증, 통장 등등을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A4용지를 꺼내 이렇게 써 내려갔다.
'내가 다시 이 방에 돌아 올수 있을까? 정말 올 수만 있다면........'
유서가 아닌 '마음의 글'을 서류 옆에 가지런히 놓고 사무실을 나왔다.
금방이라도 내려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의 별들이 이 밤따라 참으로 아름답기만 했다.
다음 날 아침.
수술 집도 의사 세분과 마취과 의사 두 분이서 무려 열다섯 시간의 대 수술로
나는 다시 새 생명으로 태어났다.
오른 쪽 귀 밑에서 턱 밑 부분까지 메스로 길게 잘라 완전 뒤집은 상태에서
볼 안쪽에 달라붙은 종양을 제거했다.
그 자리의 움푹 파인 피부는 왼쪽 팔목의 피부를 떼 내어 입속으로 이식을 했다.
팔목의 살은 대퇴부의 피부 살로 이식을 했다.
대퇴부는 그냥 새 살이 돋아 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조그만 종양 덩어리가 온 전신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치과병동 718호실의 처음 일주일은 참으로 힘든 나날이었다.
완쪽 팔목은 석고를 붙여놓아 꼼짝도 못한 상태에서
콧구멍으로 비닐호수를 위까지 집어넣어 음식물을 투여했다.
그 상태에서 끓어오르는 가래를 수시로 뱉어내야만 하는 것은 마치 지옥과 같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평소의 체력단련 덕을 많이 봤다.
입원한지 17일 만에 퇴원 할 수 있었다.
암환자치고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얼마 전 신문에서 암환자가 된 병원의사 세분의 말에 동감한다.
어떤 병이든 일단 발병하면 환자 자신들은 자신의 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이다.
병과 함께 공유하면서 즐겁게 생활하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병을 이기게 된다고...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왜 하필이면 나야?'라고 부정하거나 저항하지 말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의 나약한 의지로는....
나는 또 한 번 나 자신에게 다짐한다.
- 욕심을 내지말자.
- 그냥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자.
- 조금 더 살겠다고 매달리지 말자.
-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게 보여 진다는 것은 너무 싫다.
죽고 사는 것은 신(神)의 마음대로지만
그러나 세상사는 자신의 마음먹기에도 달렸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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