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부2

노년 예찬

728x90







우리 집의 아침은 늦게 밝는다.


일흔네 살의 남편과 예순아홉의 아내가 사는 집,

출근길이 바쁜 직장인도, 학교에 늦을 학생도 없으니

남쪽 창의 햇살로 눈이 부실 때까지 마음 놓고 잠에 취한다.


노령에 들면 초저녁잠이 많아 저

절로 아침형 인간이 된다는데

우리 내외의 수면 형태는 여전히 젊은이 같아

잠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러나 얼마든지 게을러도 괜찮은 나이 늦은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나는 내게 찾아온 노후를 예찬한다.


식사 준비도 간단하다.

잡곡밥에 국, 그리고 김치와 생선 한 토막이 전부다.

나는 남편에게 초라한 밥상을 내밀며 자랑이나 하듯 말을 한다.

조식(粗食)이 건강식인 것 아시지요?


조악한 음식이라야 노후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핑계를 대며

적당히 소홀한 식탁에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중얼거린다.

늙었다는 것은 정말 편한 것이구나.

식후의 커피처럼 황홀한 것이 또 있을까.


우리 집의 식탁이 놓여있는 북쪽은 전면이 유리창인데

찻잔을 들고 건너다보면 앞집의 남쪽 정원이 마치 내 집 마당처럼 눈에 들어온다.

나는 가꾸는 수고 없이 그 안에 가득한 꽃과 나무를 즐긴다.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

분주한 젊은이에겐 어림없는 일이다.

한유(閑遊)의 복은 노후의 특권이다.


느긋하게 신문을 본다.

아파트 분양시장에 며칠 사이 수 십조 원에 이르는 자금이 몰렸다는 기사를 읽는다.

이익이 있는 곳이면 벌 때가 되는 군상들,

권력을 잡기 위한 사투의 현장은 전쟁터를 능가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어느 낯선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 같이 아득하다.


일상에서 초연해지는 것이 ‘늙음’의 은총인가.

만용이 사라지고 과욕이 씻기어 나가고….


인생에서 어느 시기를 제일 좋은 때라고 말 할수 있을까,

뛰어놀고 공부만 하면 되는 어린 시절일까

이상(理想)에 도전해 보는 열정의 청춘 시절일까,

아니면 가정을 튼(건)실히 이루고 사회의 중견이 되는 장년 시절인가.

도전하고 성취하고 인정받는 이런 시절은 가히 황금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좋은 시절에 나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하나를 이루면 둘을 이루지 못해 불행했고,

경쟁의 대열에서 낙후되는 것 같아 불안했으며

내게 있지 않은 것을 찾아 헤매느라고 내게 있는 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면서 패잔병처럼 밀리고 밀려 추락의 끝이라고 생각한 ‘노후’라는 땅에 당도했다.

그러나 내가 도착한 ‘노년’은 축복의 땅이었다.

잃을 것이 없는 빈손 때문이 아니라

얻으려는 욕망이 걷힌 빈 마음으로 풍요의 고장이었고,

비로소 ‘최선’이 바로 보이는 밝은 눈의 영토였다.


책임에서도 의무에서도 자유로운 나이 세상에 있되

세상에 묶이지 않는 평화와 고요가 가득한 곳이었다.


어제는 결혼 4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늙어 무력해진 남편과 주름진 얼굴이 추한 아내는

젊은 시절 한 번도 나누어 보지 않은 정다운 눈빛으로 서로의 백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을 잡고 우리 내외에게 노후를 허락하신

우리 생명의 주인께 진실로 감사의 마음을 드렸다.


- 유선진씨의 노년은 젊음보다 아름답다 에서 -



728x90

'부부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둘이서만 사는 줄 알았다.  (0) 2019.07.22
친정엄마는 어느 쪽?  (0) 2019.07.19
황혼의 슬픈 사랑 이야기  (0) 2018.12.05
감사합니다   (0) 2018.11.28
부부사이에 최고의 막말 ‘당신 엄마!’  (0) 2015.12.15